공부만 잘 하는 헛똑똑이란 건 날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. “공부가 제일 쉬웠어요. 인생에선 삽질깨나 했죠.”로 내 삽십여 년의 삶을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.ㅋ 내가 공부에만 빠졌던 것도(여기서 공부란, 고등학교 교과서 파는 걸 말한다. 요즘 나는 확실히 한 분야를 깊게 파는 걸 싫어한다. 통역 공부는 팽개쳐 둔 지 한참, 육아도 이년 반 하고 나니 이제 시들.-_-) 속세(?)에 회의를 느껴서였으니,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엉뚱한 데서 상식 부족하고 다들 쉽게 하는 걸 괜히 어렵게 둘러가는 것도 크게 이상한 게 아니겠지.
사회생활 좀 한 애가 “근데 왜 아파트가 인기가 있는 거예요?” 하니까 (부동산에 대해 하나도 몰라서 진지하게 물었던 거다) 선배가 병신 보듯(ㅋㅋ) 쳐다보던 게 생각나는구나. 울 학교에서 나보다 수능 잘 본 친구가 연대 의대를 특차로 갔던 걸 이해 못했던 것도 지금 생각하니 웃기고(난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도 무조건 서울의대를 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), 어머니는 ‘순리대로’ 키우자고 하시는데 미친 듯이 책을 파며 애를 책대로 키우려고 바둥대는 것도 좀 웃기고. 아, 나 왜 자꾸 무덤 파고 있지.-_- 생각나는 건 많은데 이쯤에서 그만.ㅋㅋ
아무튼, 최근에 내가 깨달은 사실은 ‘나도 놀아도 된다’는 것, 그리고 ‘내가 노는 게 가족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’는 것이다. 남편한테 이 말을 들었을 때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.
추석 주간 내내 시댁에 있었는데, 이게 오래 있다 보니 내 집 살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. 하나 둘씩 손을 대다 보니 장난이 아닌 거다. 이전까지 잘 모르고 쓰던 방도 다시 보니 먼지투성이고(어머니 계실 땐 어머니가 청소 다 해주셨으니까), 부엌 수납도 다시 보니 너무 불편하게 되어 있고. 그래서 대대적인 청소와 정리에 나섰는데 하다 보니 몸이 힘들다. 그래서 남편한테도 이것저것 시키면서 왜 내가 기대한 만큼 일을 많이 해주지 않냐고 짜증을 내며 혼자 기분이 막 다운되고 있었다.
나도 알았다. 그냥 손 안대고 넘어가면 될 것을,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손을 대서 내 몸 힘들게 만들고, 그러다 보니 짜증이 나고 남편까지 괴롭히며 명절을 힘들 게 만들고 있다는 걸. 근데 이게 또 한 번 손을 대니 강박적으로 끝을 봐야 할 것 같았다. (이건 내 고질병 인정) 거기다 애도 봐야 하니 일은 넘치는데, 뭐 하나 포기하지 못하고 다 하려고 기를 쓰다 혼자 망가지고 있는 거다. 남편까지 괜히 구박하고. 우선 순위를 정해서 포기할 건 과감하게 해야 하는데, 그거 잘 못하는 것도 내 고질병 인정. 근데 다 인정해도,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다.
보통은 내가 짜증 부려도 듣기만 하고 코멘트가 없는 남편이, 이번엔 한참 듣다 그러더라. 솔직히 자기만큼 하는 애 아빠도 잘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리 불만이 많냐고. 나도 그랬다. 그건 맞지만 일이 너무 많은데 어떡하냐고. 남편이 그런다. 당신도 좀 놀라고. (남편 혼자 놀다 들어온 것에 대해 불평하던 상황이었다.) 당신 얼마 전에 책에 푹 빠져 있을 때는(‘양육가설’이 너무 재미있어서 젖 먹일 때, 화장실 갈 때도 계속 노트북을 끼고 있었다) 틈만 나면 책 보려고 하고 집안일은 최소로만 했다고. 그 때는 집안일 좀 덜 해도 괜찮았고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았다고. 그래서 자기가 좀 놀다 오는 것도 개의치 않았고 지안이한테 짜증도 덜 냈다고.
내가 그 때 그랬었나? 정말 그랬네. 한 방 맞은 느낌. 그러니까 같이 힘들게 일하자고 종용하지 말고, 같이 좀 쉬자고, 당신도 일 말고 재미있는 걸 하나 찾으라는 말에 또 한 방. 왜냐하면, 나는 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아서. 스스로도 힘들고 가족들도 힘들게 하면서 죽으라고 일만 하고 있었구나. 누구 좋으라고. 좀 더럽게 살면 어때.
“난 애 엄마니까 일 하는 거랑 공부하는 거 빼고는 하면 안 되는 줄 알았어. 그 책 읽으면서도 재미있긴 했지만 애들한테 신경 덜 쓰는 거에 대해 죄책감 느끼며 읽었단 말야.”
“앞으로는 죄책감 느끼지 말고 해.”
내가 즐거워야 가족들도 즐겁다는 건 알았지만, 그 즐거움은 오직 가족을 위한 일을 하면서만 느껴야 하는 줄 알았다. 전엔 안 그랬는데, 애 둘이 되면서 또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 살고 있었구나.
남편이 또 그런다. 나도 시간 나면 집안일 찾아서 하지 그냥 노는 사람 아니야. 당신이 그래? 난 당신은 노는 줄 알았어. 아냐, 여보 기준에 못 미쳐서 그렇지 식기세척기에 그릇 보이면 찬장에 넣고 하잖아. 그렇구나.. 하긴, 산후 조리 중에도 잠시도 그냥 못 있는 날 보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더라. 그러니까, 내가 심하게(스스로를 괴롭히는 수준까지) 부지런한 거고 남편은 적당히 부지런하고 적당히 여유를 낼 줄 아는 거네.
휴.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. 그래서 오늘은 죄책감 없이, 애들 둘 다 시댁 이층에 맡겨놓고, 나 혼자 일층에서 블로깅을 한다. 아, 기분 좋다. 그리고, 현명하기까지 한 우리 남편은 진짜 로또 남편 맞다.



